찻잔에 남은 생각앞니로 느껴보는향기는 연두빛이다하얀발레복 춤추는 깨금발어깨동무한 속살들은꽃서리 마저 따닥따닥제 몸 태우며 향내 뿌린다수줍은 모양으로 고개숙인 새색시였다갸날픈 절개는 구름을 걷는봄바람으로 흔들린다다시는 꽃피우지 못할 듯이 절실하다달그림자 가볍게 내리는 날찻잔에 터져나오는 노란 분수에 취한다잘근잘근 앞니로 느껴본 향기에그리움은 시간의 들판을 건너 네 생각을 잡는다김 귀 옥canopener학원 원장제2회 전국문학인 꽃 축제 백일장 우수상영남대학교 문예예술과정 수료영남문학 시 등단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정치란 크게 보면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정치철학을 소유한 정치가라면 누구나 바르고 효율적인 정치를 통해서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고,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정치지도자가 되고 싶을 것이다.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정치는 동서고금의 정치지도자들의 꿈이요 희망이었지만, 생각보다 이를 실현한 정치지도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많은 정치가들이 의외로 겉으로는 국민을 위한답시고, 내심으로는 자신의 아집에 좇아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여론이나 국민의 뜻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잘못된 신념이나 주장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당선자가 최근에 대통령집무실 이전문제를 두고 국민여론의 53%가 반대하고, 36%가 찬성하는 여론이 엄연히 존재함을 알면서도 급박한 집무실 이전을 고집하는 처사나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무조건 당선자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는 한심한 주변세력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권을 잡으면 뭔가 달라지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너무나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인 일을 가장 절박한 일인 양 안달하며 조급증에 빠져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처사 역시 바람직한 국가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일의 경중을 알고, 매사 신중하고 심사숙고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은 국가지도자가 지녀야 할 기본덕목이다. 우선 현 시국에서 무슨 일이 가장 긴급하며, 국민을 위하는 일인지 인수위가간이나 그 후에도 깊이 생각하고 고민한 이후 일을 미래안목을 갖고 차분하고 무게 있게 처리함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대사를 처리함에서 정파적 시각에 집착한다든지, 보이기식 과시주의에 집착한다든지, 승패의 투쟁적 인식에 빠져 일을 조급하게 생각하는 경박함은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현 문재인 정부 역시 정치의사를 결정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승부의 개념에 집착한다든지, 국민의 여론을 무시한 무리한 인사정책, 출구를 잃은 부동산 정책, 소통이 부족한 원자력을 비롯한 에너지 정책 등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상당한 불신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정책은 결국은 국민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정치는 국민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기에 많은 부분이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투표기간에는 표를 얻기 위하여 국민들에게 온갖 미사여구로 국민을 유혹하고, 선거가 끝나기만 하면 언제 그랬느냐며 시치미를 떼는 이율배반적인 정치인의 모습이 참으로 역겨울 정도이다. 실언을 밥 먹듯 하는 조령모개의 정치인들의 모습은 차라리 장삿꾼 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는 진실해야 하고, 깊어야 하며, 무거워야 하고 또한 유유자적해야 한다. 정치가는 겉만 번지르르한 내로라하는 보이기식 자기정치를 앞세우기에 앞서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진실한 정치가라면 먼저 국민의 마음을 살피고, 국민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 경제가 잘 발전하고 운용되기 위해서 시장원리에 따르는 것이 좋듯이, 정치가 잘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민주적 의사결정원리에 따라야 한다. 경제는 경제원리, 즉 시장원리에 충실해야 경제가 잘 되고, 정치는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원리를 준수하고 국민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치의사를 결정해야 한다. 일찍이 영국의 사상가 벤담( J. Bantham)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상사회 최고의 가치로 보았으나, 이 말의 뜻을 요즘 정치가에게 요구하면, 국민의 다수여론을 존중하는 정치의사 결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말한다고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경제에서 시장원리를 생활현장에서 잘 활용하는 사람은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해 나갈 수가 있듯이 정치에서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정치가는 정치에서 성공을 하고 국민들로부터 오랜 기간 환영을 받을 것이다. 옛날 중국의 섭나라 임금 섭공이 공자를 찾아와서 “정치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공자는 “정치란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리워서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외에도 공자는 “정치는 현인을 선택하는 것이다”. “정치는 경비를 절약하는 것이다.” 등 다양한 표현으로 정치의 도를 설명했다. 이러한 공자의 표현을 성공하는 정치 경제의 원리로 이해해 보면, 정치는 결국 국민들의 마음을 얻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다스림이요, 처방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정치 사안도 근본적으로는 시장에서 수요자의 마음을 얻는 경제 원리와 같은 방식으로 결정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정치이며, 국민 행복을 극대화하는 올바른 정치의사 결정이 될 것이다. 역대의 성공한 정치가를 살펴보면, 그들은 위기에서는 나라를 구하고, 평시에는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를 펼친 위정자였다. 물론 현대사회는 과거와는 다른 복잡한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정책결정을 위한 정치사안 하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해관계가 얽히고 ㅤㅅㅓㄺ혀 있다. 수많은 변수가 얽혀있는 정치의사결정을 바르게 내리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이를 두고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자본주의 지식의 안경을 쓰지 않고는 현상을 판단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현대자본주의 사회는 국민 계층 간 이해관계가 대립되어 있고, 정치적 이념과 지지하는 정파적 가치가 서로 다른 많은 복잡한 상호이해관계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서 합리적이고도 국민 다수를 행복하게 하는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별 전문가의 눈을 빌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복잡해진 사회일수록 분야별 전문가의 지식이 더욱 필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복잡한 이해관계속의 부동산문제, 장기적인 에너지 수급의 문제, 기후환경변화에 따른 디양한 질병대책 등의 현대사회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은 대부분 고도의 분야별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는 주요정책의 결정에 있어서 국민적 합의를 얻는 일이며, 둘째는 분야별 전문가의 의견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먼저 국민적 합의를 얻는 문제는 일반국민들이 해당분야의 정책 사안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할 때까지 다양한 언론매체를 통하여 관계전문가들과 해당분야의 지식을 교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장시간 토론을 하고 국민이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청하기 좋은 시간대에 지상파방송 등의 고정적인 “정책토론 광장”을 지속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현대는 정치에 관련되어 있는 변수들이 너무도 많다. 경제문제는 이미 정치경제라고 얘기해야 할 정도로 정치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에 속하며, 그 외에도 사회문제, 교육문제, 국방문제, 외교문제, 문화문제, 의료보건 등 수많은 과제들이 정치와 긴밀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정치는 수많은 변수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종합예술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조화롭게 처리해나가는 적극적인 정치기술이 필요하다. 정책선택에서 정치의사의 합리적 결정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국민적 이해를 통해서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다수의 국민이 정부의 의도와 정책선택의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는 정부는 국민설득을 위해 유효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언론매체 등을 인내력을 갖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성공하는 정부 또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의 요구를 잘 알아야 하고,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효율적이고도 합리적인 처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정치는 국민의 만족과 행복의 크기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좋은 정치는 가장 효율적인 무상의 행복서비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많은 정성과 국민 한사람의 마음을 귀하게 생각하는 정치의식이 중요하다. 그 바른 길은 전문적인 지식이 충분하게 향수되는 문화적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도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수준 높은 정치가의 정치적 지성이 투영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소통과 지식의 나눔을 통해서 고차적인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정치가이어야 만이 진정 21세기 문화강국 코리아를 이끌어갈 자격이 있는 정치지도자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요, 고급 지식정보가 보편화 되는 시대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 IT 강국 한국의 지식과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정치의사를 바르게 수렴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행복을 제고시킬 수 있는 정치혁신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김미숙 시골에는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다.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귀농 귀촌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귀농은 장밋빛 환상이 아니다. 손수 밭을 갈고 나무를 심어야 하는 노동이 들어간다. 귀농은 삶의 터전은 물론 생활 방식과 가치관까지 한꺼번에 바꿔야 하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땅을 선택 한 젊은 농부가 있다. 경산 육동에서 미나리 농사를 짓고 있는 황하철 씨가그 주인공이다. 귀농 실패의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는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지만 그는 그럴 만한 성격이 안 되었다.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부터 옮겼다. 그가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곳은 저유소였다. 주유소보다 좀 더 큰 규모의 기름 저장고였다.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해서 직장에 다니다 보니 사회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대학교에 가서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진학을 했다. 섬유학과에 들어간 그는 한 학기를 하고서 군에 들어갔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남자답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공수부대에서 5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남자들은 군대 얘기만 나오면 졸다가도 눈이 반짝인다는데 그도 그랬다. 군대에서의 혹독한 훈련과 몸에 밴 생활은 평생 간다고 했다. 그는 제대를 하고 바로 신협에 취직을 해서 대부와 채권 관리를 맡았다. 돈을 빌린 뒤 돌려주지 않고 달아나는 사람들을 잡느라 새벽녘까지 집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늦은 밤이나 새벽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은 7년 가까이 했다. 어느 날 사무실로 큰일이 났다고 연락이 왔다. 외출 중이었던 그는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갔다. 노인이 농약을 마셨다고 하면서 사무실 직원들은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전날 노인네를 만나 차마 돈을 갚으라는 얘기는 못 하고 술잔 기울이다 헤어졌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지다니 마음이 아려 왔다. 돈 떼먹고 달아나는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사실 달아나는 게 아니었다. 시골에서는 아는 사이면 서로서로 맞보증을 섰다가 갚을 능력이 되지 않자 죄 없는 사람을 잡는 것같았다. 월급을 받으면서 험한 꼴을 봐야 하는 자신이 한없이 서글폈다. 일도 일이지만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자신이 동조한 것 같아 만나는 사람마다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다음 날 그는 화사를 그만뒀다. 그 후로 중고 자동차 판매하는 곳에서 몇 년 동안 근무를 했다. 그 일을 위해서 사람들을 많이 알아야 했다. 청년회 회장을 맡고 여러 단체에서 깃대를 앞세우며 일하느라 정신없이 몇 년이 흘렀다. 그 세월은 늦게까지 술을 마셔야 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이 어려웠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신이 필요할 때 언제나 일을 앞세웠다. 그러면서 바깥일에는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숨을 헐떡였다. 어느 날 지인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갈 즈음 사골에 빈집과 땅이 있다는 소리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가족과 함께 일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생각했다. 여태껏 사람들과 복잡하게 얽혀 살았으니 이제는 자연을 가까이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들었던 것이다.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다음 날 바로 시골로 이사를 했다. 그해 겨울은 시골에서 났다. 불혹의 나이가 될 때까지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고 상처받았던 마음을 시골에 와서야 추슬렀다. 그러다 보니 한 계절이 후딱 지나갔다. 봄이 되자 농번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미나리 농사를 시작했다. 그가 정착한 곳은 경산에서도 오지 마을 육동이었다. 지난봄 처음 그들 부부를 만났을 때 미나리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농가에서 삼겹살을 구워 미나리와 함께 점심을 나누었다. 그들을 알기 전에는 미나리 농사짓는 사람은 떼돈을 버는 줄로 알았다. 1kg 한 봉지에 만 원 가까이 하니 다른 농사와는 비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나리를 가꾸는 데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미나리는 물과 공기와 바람이 좋아야 하고 배수가 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맛과 향기와 영양가가 높은 야채로 길러진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미나리는 더러운 곳에서 자라 생것으로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미나리는 청정 지역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지하수를 퍼 올려서 길러진다. 그것을 알고는 난리법석이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미나리를 먹어야 봄을 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들 하우스 안에도 미나리가 가득했고 미나리 향을 맡기 위에 도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미나리 농사를 지으며 과일 농사를 보탰다. 말없이 남편을 돕는 그의 아내가 대견스럽다. 일이 고되고 힘들겠지만 그는 몇 년 전의 아내를 떠을리면서 너무나 미안해 한다. 아이들 키우면서 살림하는 것도 모자라 휴대폰 가게까지 운영할 때는 행복한 얼굴이 아니었다. 요즘 그녀의 얼굴에 꽃이 피고 있다. 농촌 일은 여자들의 잔 손이 많이 간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과 함게 밭에서 늘 일을 한다. 을봄,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고사리 손으로 아빠를 돕는다. 아들과 아빠의 모습이 정겹다. 이제 그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느끼면서 산다. 그의 얼굴에도 아내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한다.
이 재 희1949년 경북경산출생(전)역도선수(현)대구 해안농약사 대표 봄 진달래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산천이 흔들리어 날아가는 종달새 더는 못가네 꽃향기에 취한 애기구름 한송이 길을 잃고 헤메인다 아! 봄 봄은 너무나 황홀한 계절
송하 전명수- 경산시 용성면 고죽리 출생- 수필가- 교육행정직 공무원 정년퇴직- 저서: 수필집 「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 (사) 대구문화재지킴이회 회원,- (사)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 사회복지법인 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 대구문화기행단 운영- 녹조근정훈장 수훈 임인년 정월 대보름날이다. 도시 생활이 갑갑하여 고향에 머무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자 고향에 친구들과 교유하는 시간이 잦아지게 되어 즐거운 시간이 늘어나는 듯하다. 옛날 같으면 정월 대보름날이 명절이다. 오곡 잡곡밥에 아홉 가지 나물로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호도나 강밥으로 부름을 깨기도 하였다. 주로 혼자 지내고 있는 터라 인근 동에 사는 친구가 낮에 찰밥 먹고 가라 하였다. 고맙고 기쁜 마음으로 친구댁에서 맛나게 점심을 먹고 난 후 친구는 자기 조상 한분을 소개하면서 같은 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인지재(仁智齋)로 안내하였다. 친구 최용석 군은 영천최씨 원당 문중 대표라 문중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인지재는 경북 경산시 자인면 원당길14길 19(원당리)에 위치하여 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자인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1557-1599) 선생이 강학소를 설립한 후 의병을 일으킨 장소이다. 처음에는 인지정사(仁智精舍)라 부르다가 그 이름을 인지재로 바꾸었다. 최문병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18세기 초에는 서당으로 활용하였으며 선생을 추모하던 용계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어 최문병 선생의 신주를 이곳 인지재에 모셔 추모하였다. 용계서원은 1986년에 복원되어 선생의 신주를 다시 모셔갔다. 인지재는 1,643㎡의 네모반듯한 대지 위에 본당과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구조는 우측에 대청마루 한 칸과 좌측에 2칸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전면 반 칸은 툇간을 두었다. 규모가 비교적 작은 건물이지만 방문을 열면 방과 대청이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공간의 구성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조선 중기 지방 강학소(講學所)의 건축 구성을 가진 소박한 건물이나 의병장 최문병 선생이 수학하다가 임진왜란 때 자인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 장소라는 점에서 경상북도 의병사(義兵史)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2019년‘경산시향토문화유산보호및관리에관한조례에 의거 인지재(仁智齋)를 첫 번째로 경산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최문병 선생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일장(日章), 호는 성재(省齋)이며 부친은 최식(崔湜)이고 모친은 경산전씨(慶山全氏)이다. 선생은 1557, 4, 20 지금의 경산시 자인면 울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산 자인에 살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후학 양성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장 과정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부모에게 효도하는 본을 보이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천장산(千丈山)에서 자인과 인근의 왜적을 격퇴하였으며, 자인의 관곡(官穀)을 무사히 지켜내는 등 자인지역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문병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탁월한 예지력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화살과 창 등을 미리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는 김응명 선생의 부친인 김우련 선생과 힘을 합쳐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지방의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최문병 선생은 장신에 건장한 신체를 가졌으며 그의 조상은 주로 무인이 많았다고 하니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듯하다.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朴慶傳) 의병장의 지원 요청에 따라 그와 합세하여 두곡(杜谷)·선암(仙巖)·가지현(佳旨縣)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며 팔공산 회맹에도 참여하였다. 이어 다시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의병장과 합세하여 하양, 와촌, 영천 등지의 적을 물리친 공으로 1593년에는 동지중추부사 박진(朴晋)의 상주로 인하여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뒤에 한성부윤에 추증되었고, 자인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최문병 선생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인현 복현 운동에 앞장선 선각자였다. 자인은 995년 행정구역이 고려국 영동도 장산군 자인현이었다. 그 후 1018년(고려 현종 9) 경주부의 속현이 되어 자인은 경주까지 거리가 멀고 험한 길이었으며 경주부의 관원들로부터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재산상의 피해와 극심한 고초를 당한 지역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피해를 벗어나는 길은 자인이 복현되어 현감이 파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최문병 선생이 주동이 되어 1584. 4. 13. 자인 유향소 좌수 안량, 별감 권응형, 유사 임세진, 장병 이응기 등과 함께 자인현 복현 운동을 시작하였다. 최문병 선생은 당시 26세의 나이로 자인의 품관이었다. 자인 우시장에서 소를 구매하고 현민을 규합하여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서 복현 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의한 후 임금에게 올릴 상소문을 경상도 관찰사 류성룡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거사는 경주부 관원들이 알게 되어 1584. 5. 1. 최문병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경주부로 압송되어 심한 공초(供招)를 당하였다. 공초의 죄목은 관부(官府) 사칭, 뇌물 갹출, 경주부 배반, 농우 도살 등으로 엄한 처벌을 받았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기세를 바탕으로 1599년(선조 32) 제2차 자인현 복현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나이 42세였고 제1차 복현 운동을 전개한 지 15년 만이다.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은 경주부를 방어한다는 구실로 자인에 주둔한 군인 전원을 차출해 가는 바람에 자인은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평소에는 자인 주민들을 착취하다가 정작 위기 시에는 자인을 버린 셈이 되었다. 감목(監牧) 신분인 최문병 선생은 1599년 봄 최두성, 이기업 등과 자인을 대구부에 합속시키려고 경상도 관찰사 한준겸에게 소장을 올렸다. 이에 경주부에서는 1599. 7. 14. 반박 소장을 올렸는데 관찰사는 경주부의 손을 들어 주어 최문병 선생의 생전에 그 뜻을 이루지 하였다. 그 후 1633년에 백렴, 방희국 등이 각각 상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1637년 김응명, 이시험, 이창후, 백현룡 등이 다시 복현 상소를 올려 인조 임금으로부터 윤허를 받고 1637년 6월에 초대 현감 임선백이 파견되었다. 이처럼 최문병 선생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장으로 약 1,000여 명이라는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을 물리친 공로가 지대하다 하겠다. 그리고 경주부 속현된 자인현을 두 차례에 걸쳐 복현 운동을 전개하다가 심한 공초로 인하여 1599. 8. 4. 4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자행되어 온 경주부의 갖은 행패로부터 자인 현민들을 구하려는 애향심의 발로에서 시작된 복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좌절감과 극심한 공초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듯하여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앞을 가린다. 최문병의병장안장 최문병 선생이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던 말안장이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 경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말안장은 최문병의병장안장(崔文炳義兵將鞍裝)이란 명칭이 붙여져 있는데 길이 56㎝, 너비 39㎝, 높이 34㎝이고 안장은 등자(鐙子), 띠, 고들개 등 부속 장구를 모두 갖추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앞뒤 안교(鞍橋)는 나무로 윤곽을 잡고, 가는 골제(骨製)로 복륜(覆輪)을 붙였으며 쇠로 고정시켜 놓았다. 앞뒤 안교의 바깥쪽에는 고슴도치 가죽을 씌우고 세 곳에 골편(骨片)으로 꽃모양 장식을 만들어 붙였다. 안교의 아래쪽은 둥글려서 파내고 그 테두리에도 골편을 붙였다. 말다래가 달린 안장자리는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가로 105㎝, 세로 26㎝의 크기이다. 등자는 철제이고 발디딤은 둥근 모양이다. 그리고 배 띠와 고들개는 마포(麻布)와 면직(綿織)으로 만들었다. 이 안장 금구들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희귀한 마구(馬具)로서, 괴목제(槐木製)의 책상과 저지(楮紙)로 만든 지함(紙函)이 함께 전해오고 있다. 성재 선생 사후 약 50년 후인 1646년에 그의 후손 최영기가 선생의 활약 사항과 글을 묶은 「省齋先生實記(성재선생실기)」 상, 하 두 권을 편찬하여 전해지고 있다. 인지재(仁智齋)가 현 원당리(元堂里) 소재로 이건(移建)한 시기는 자인현(慈仁縣)이 지금의 신관리(新官里)에 소재하였다가 원당리로 이건한 후 관아에 우환이 잦아들자 북사리로 옮겨간 이후이다. 인지재를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710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그때 이곳에 인지재가 세워진 것이다. 지금의 인지재(仁智齋) 자리는 1666년 현감으로 부임한 남궁옥(南宮鈺)이 원당리로 관아를 옮기면서 이후 3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한 원당리 소재 자인 현청(縣廳) 부지였다. 그러니 인지재 부지는 자인현청(慈仁縣廳)이 소재하였던 경산의 중요 기록유산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의병(義兵) 창의(倡義)를 숙의(熟議)하였으며 봉기(蜂起)를 도모하였던 교두보(橋頭堡)로 중요한 유적이므로 더욱 다듬고 길이 보존하여야 할 경산 임란 의병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그런데 지금의 인지재(仁智齋)는 부서진 기와지붕에 빗물이 흘러 흉물스러운 천막(天幕)을 씌워 놓았고 10개의 초석(楚石)에 놓인 기둥은 균형을 잃은 듯 기울어지는 상태이다. 뜻하지 않게 예지력이 뛰어나고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크게 공을 세운 충신이요, 자인현 복현 운동에 앞장섰다가 고초를 겪은 선각자 한 분을 만난 일은 분명 행운이었지만 너무나 일찍 세상을 하직한 점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또 그분을 기리는 전각이 바라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허술한 점이 후예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마음이다. 경산시 지정 문화유산이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음에 씁쓸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긴다. (2022. 2. 15. 화)
국회의원윤 두 현 경산자치신문의 창간 26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장기화 되고 있는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유례없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시민들의 안전에 보탬이 되는 동시에 알 권리를 충족시켜 온 김문규 대표와 임직원 여러분의 노력으로 경산자치신문이 더욱 발전하리라 믿습니다. 지난 26년동안 경산자치신문은 생생한 지역 소식을 전하며 경산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 경산 발전에 이바지해왔습니다. 경산묘목길 걷기대회를 계속 주최·주관하며 100년 역사와 전통을 가진 경산 묘목 홍보에도 힘썼고, 또한 과거 재래시장 살리기 운동에도 동참하는 등 경산을 위한 지속적 노력에 대해 경산시민들은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 경산을 위해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민심을 대변하여 지금의 어려움 극복과 경산의 발전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다시 한번 경산자치신문 창간 26주년을 축하드리며, 임직원 여러분과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경산시장최 영 조 경산자치신문이 창간 26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을 28만 경산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늘 가까이에서 시민들과 소통하고 지역 여론을 대변하며 부단히 노력하신 김문규 대표님을 비롯한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경산자치신문은 시민들에게 알찬 소식을 전하고 정론직필하며 지역 언론으로서의 입지를 넓혀왔습니다. 앞으로도 지역을 대표하는 언론사로서 새롭게 나아가고, 올곧은 언론의 길을 고수하며 시민을 위한, 시민과 함께하는 신문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 시는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누구보다 선도적으로 첨단산업과 더불어 희망과 나눔이 있는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희망찬 경산의 미래에 경산자치신문이 든든한 동반자로서 언제나 함께 나아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창간 26주년을 축하드리며, 경산자치신문의 무궁한 발전과 임직원, 애독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경산시의회 의장이 기 동 경산자치신문의 창간 26주년을 28만 경산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특히 코로나19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언론사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항상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올바른 지역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임·직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산자치신문은 지난 1996년 4월 4일 창간하여 객관적이고 바른 평론으로 지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지역사회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등 언론사로서의 책임을 다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지역언론을 대표하는 핵심 언론으로서 지역발전과 지역문화 창달에 앞장서 주시길 기대합니다. 경산시의회도‘시민과 함께하는 열린 의회’라는 목표 아래 시민의 다양한 요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시민과 끊임없이 소통해 나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경산자치신문 창간 26주년을 축하드리며, 지역과 함께 든든한 동반자로서의 언론사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경산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윤 진 필 경산시민과 함께 소통하며 공정한 언론보도를 통해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경산자치신문의 창간 26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더불어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지역발전과 건강한 여론 형성에 애쓰고 계신 김문규 대표님을 비롯한 직원 여러분들께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지역이라는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도 새로운 이슈를 창출하고 전파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고 있는 경산자치신문이 지역언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시민의 마음을 보고 시민의 마음을 읽는 균형적인 시각을 가진 따뜻한 이웃같고 친구같은 신문이 되어주시길 기대합니다. 이와함께 경산산업단지 임직원들도 경산시 발전을 선도하는 경산자치신문과 함께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경산자치신문의 창간26주년을 축하드리며, 더 큰 도약을 위해 올곧고 신뢰할 수 있는 신문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경산상공회의소 회장안 태 영 경산자치신문의 창간 26주년을 지역 상공인들을 비롯한 28만 경산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정론직필을 실천해 오신 김문규 대표님를 비롯한 자치신문 임직원 여러분들의 노고에도 위로와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덧 창간 26주년을 맞은 자치신문은 세상을 보는 밝고 투명한 눈과 깨어있는 파수꾼으로서 경산시민들의 알권리 충족과 지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오면서 경산의 발전은 물론, 지역 언론문화 창달에도 큰 기여를 해 왔습니다. 또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역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 건전한 비판과 대안 제시로 지방자치시대에 걸맞는 지역 언론상의 본보기가 되어 왔으며, 건전한 지역사회 조성에도 큰 역할을 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경산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 제공과 지역을 알리고 대변하는 구심점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해 주시기를 당부드리며, 아울러 자치신문이 시민들의 여론광장으로서 화합과 소통의 마당이 되어 더욱 사랑받는 지역 언론으로 성장 발전해 나가기를 기원하며, 다시 한번 창간 26주년을 축하드립니다.
경산문화원장이 부 희 기나긴 겨울 가뭄을 이기고 새 생명이 돋는 봄이 돌아왔습니다. 꽃샘추위와 겨울 가뭄을 견디고 돋아나는 새순들이 반갑고 고마운 이유는 고난을 견뎌냈기 때문입니다. 지역 언론인 경산자치신문이 창간 26주년을 맞이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6년이면 한창 젊음을 발휘하는 청년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경산자치신문이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매주 경산자치신문은 지역민들에게 지역 소식을 전하고 행정과 정보를 전하는 소식지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시민들이 매주 배달되는 자치신문을 통해 이웃소식도 알고, 지역 행정과 정치도 알아갔습니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입니다. 지역의 전통 문화를 발굴 계승하고 새로운 시대의 창의적 문화를 이어가려면 언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지역민과 기관을 이어주는 가교와 같은 것이 언론입니다.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발달, 대중정치의 확산은 언론의 성장과 함께 발전해왔습니다. 경산자치신문은 경산의 지역 언론으로서 그 사명과 역할을 충실히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지역 정치와 올바른 여론 형성, 지역 문화의 창달에 경산자치신문이 정론지로서 큰 역할을 수행하리라 믿습니다. 경산자치신문 창간 26주년을 크게 축하드리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대한노인회 경산시지회장최 재 림 ‘새로운 미래로 함께하는 희망 경산’에서 시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경산자치신문의 창간 26주년을 28만 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할 말을 하는 신문’을 창간 이념으로 경산 시민의 성원에 힘입어 시민의 눈과 귀가 되는 경산자치신문은 지난 26년 동안 시민의 알 권리를 위해 소통과 공론의 장으로서도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동안 희망의 끈을 이어가면서 정론의 길을 걸어오신 김문규 대표님과 임직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도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지역의 훈훈한 밝은 소리와 그늘진 곳의 소리도 알차게 보도해 주시면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노년의 아름다운 세상, 어르신의 도전하는 삶을 위하여 권익신장과 복지증진,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여 어르신들의 아름다운 노년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큰 역할을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제 지난 26년간 걸어온 발자취가 행복 경산의 길이 되고, 역사가 될 것입니다. 늘 잊지 않고 힘차게 응원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경산자치신문의 창간 26주년을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변함없는 사명감과 함께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힘차게 도약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