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은 영천 최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진 경북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이다. 곡란리(谷蘭里)는, 용성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이 마을의 개척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승되는 마을 유래에 의하면, 곡란리는 1320년쯤 밀양(密陽) 손씨(孫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후 1592년을 전후하여, 영천(永川) 최씨(崔氏)와 담양(潭陽) 전씨(田氏), 전의(全義) 이씨(李氏)가 전거(奠居)하였던 마을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는 영천 최씨 일가의 난포(蘭圃) 최철견(崔鐵堅) 선생과 그의 아들이 의병(義
▲ 내 사랑 춘향 공연장을 찾은 천마아트센터 입구 로비 경산시립극단의 제10회 정기공연‘내 사랑 춘향’이 11월 30일과 12월 1일 이틀에 걸친 공연이 영남대학교 천마아트센터에서 성황리 펼쳐졌다. 이번에 공연된 ‘내 사랑 춘향’은 고전소설 춘향전을 뮤지컬 형식의 현대적 감각과 퓨전(fusion)을 가미한 해학적 표현을 가미한 작품으로, 이틀에 걸친 공연을 통해 1,500여 관객들에게 모처럼 마음을 여는 큰 박수를 받았다. 여기에는 대구·경북 지역 유명 배우 26명의 열연과 함께 국악, 현대음악, 트로트 등 다양한 음악들이 무대를 가득 메움으로 그간 코로나19로 마음에 문이 닫혔던 관객들에게 새로운 장을 여는 활력소가 되었다. ▲ 영남대학 천마아트센터 중앙무대 이에 이원종 경산시립극단 예술 감독은 이번 작품은 두 달여 동안 배우와 스태프진 40여 명이 관객들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작품을 구상하였다는 소회를 밝히면서 모처럼 쌀쌀한 날씨에도 개의치 않고 공연장을 가득 메워준 관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를 지켜본 문화계 한 관계자는, 이번 작품의 주요 화소(話素)는 주인공인 춘향이와 이몽룡에 고전적 이미지를 춘향의 거친 캐릭터와 왜소하고 샌님 같은 이몽룡의 캐릭터로 반전시킴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장르마다 삽화(揷話)되는 세련된 뮤지컬은 관객들의 막힌 가슴을 활짝 열게 하는 대역전으로 한껏 돋보이는 작품이라 평가하였다. ▲ 내 사랑 춘향 속에 뮤지컬 한 장면 이틀 동안 총 2회에 걸친 이번 공연은 혹한(酷寒) 공연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관객과 배우가 함께 호흡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관객은 모두 손을 모아 큰 박수를 보냈다. 한편 공연이 끝난 후 공연장 입구를 떠나지 못한 관객들은 이번 공연이 이로써 막을 내림을 못내 아쉬워하며, 이와 같은 공연이 상설화될 수 있는 공연장과 문화예술 부분의 지속적인 지원 방안을 관계 당국에 주문하기도 했다.
▲ 용성면 소재지 권역을 알리는 면 표지석 고죽(孤竹)1리가 소재한 경산시 용성면은 본래 신라시대 노사화현(奴斯火縣), 기화(其火)라 하였고, 훗날 자인현의 상동면과 하동면 구역이었으나, 지형상으로 압독주의 최 동극(東極)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신라의 입성(入城) 통로이자 남쪽을 여는 관문(關門)이었다. 1914년 부군(府郡) 통폐합에 따라 자인현 상동면과 하동면, 그리고 청도군 일위면 석현리 일부를 합하여 용성면이라 하였다. 관할구역은 면소재지 당리(堂里)를 중심으로, 덕천(德川)·송림(松林)·부제(釜堤)·곡신(谷新)·곡란(谷蘭)·용산(龍山)·대종(大宗)·가척(加尺)·용천(龍川)·용전(龍田)·부일(夫日-掛日)·매남(梅南)·내촌(內村)·외촌(外村)·도덕(道德)·고죽(孤竹)·미산(美山)·고은(古銀-古方里)·일광(日光-爭光) 등 20개 마을이 구성되어 있으며, 면계(面界)로는, 동쪽으로 청도군 운문면, 남쪽으로 청도군 금천면, 매전면, 서쪽으로 남산면과 자인면 북쪽으로 진량읍과 영천시 대창면을 경계하고 있다. 용성면의 역사를 가름하는 자료로는 용성면 일대에 고루 분포된 수백 기의 지석묘(支石墓)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1960년대의 개간 사업과 70년대의 농경지 정리 사업으로 모두 훼손되어 현존하는 것은 150여 기에 불과하지만, 당시 사라진 지석묘를 모두 합한다면 300기는 훨씬 넘었다. 또 출토된 많은 석기(石器)와 토기(土器) 등으로 미루어,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부락(部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용성(龍城)이란 지명은 면의 주산인 용산(龍山) 정상에 축조된 산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산은 면의 서계(西界)인 남산면 갈지리와 용성면 곡신리, 용산리와 경계를 이루며, 이 산은 해발 435.2m에 불과하지만, 용산이란 지명은 이 산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오래전 설화를 근거하고, 또한 산성에서 옛부터 이 지역을 사수하였다고 하여, 용산 성에서 용산의 용자와 산성의 성(城)자를 발췌한 것이라 한다. 용성면의 지형·지세는 동(東)으로 구룡산(九龍山)을 중심으로 남서(南西)로 반룡산(盤龍山), 용산(龍山)이 길게 띠를 이루며 우뚝 솟아있고, 북(北)으로는 금학산(金鶴山)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 용성면 소재지권 일대 전경 동쪽의 구룡산은 해발 674.8m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동서로 용산과 마주하고 있어 마치 용성인의 기개를 말해 주듯 육중한 자태이다. 용성은 소재지 서남쪽을 불쑥 솟아오른 용산과 동의 새벽을 여는 구룡산은 이른바 새 아침의 작열한 태양을 여는 관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고죽1리는 면 소재지의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금학산 수계(水系)의 하류(下流) 마을이다. 이 마을은 1, 2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1리는 조선 초기 천안(天安) 전씨(全氏)가 정착하여 개척하였다 하였으며, 고죽 2리는 조선말 김해(金海) 허씨(許氏) 허지수(許智壽) 일가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금학산에서 내려다본 고죽1리 전경 1984년에 출간된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경상북도교육위원회)에 의하면, 이 마을의 지명은 본래 마을 뒤에 큰 대나무가 자생하여 고죽이라 하였으나 그 후 죽전(竹田)이라 고쳐 부르자 마을에 환란이 잦아 다시 고죽으로 고쳤다 전승되고 있다. 성씨는 천안 전씨, 김해 허씨, 김해 김씨가 주를 이룬다. 또한 고죽리에는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는 대흥사(大興寺) 사지의 흔적과 창건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이 마을을 개척한 천안(天安) 전씨(全氏)의 시조는 전섭(全聶)으로, 그는 기원전 18년,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할 때 마려(馬藜), 오간(烏干),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 등 아홉 사람과 함께 백제 개국의 공을 세우고, 백제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이후 시조인 전섭(全聶)의 29세손인 고려 개국공신 전락(全樂)은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대구 공산전투에서 싸울 때,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던 인물로, 그 후 삼사(三司)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면서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이로부터 천안(天安)을 본관(本貫)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고죽1리를 개척하였다는 죽계(竹溪) 전극창(全克昌) 선생은 무엇보다 19세에 임란 발발과 더불어 우국충정으로 지역 청장년과 규합(糾合)하여 의병을 창의하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마을 서편 금학산 천안 전씨 선영에 조성된“조선국천안전공지묘(朝鮮國天安全公之墓)”의 묘갈문(墓碣文)에 의하면, 죽계 선생은 19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스스로 상투를 올리고, 뜻을 같이하는 일족을 뽑아 창의(倡義)하여 오목천(烏沐川)으로 밀려온 왜적(倭敵)을 자인현역 의병(義兵)들과 합세하여 물리치고, 이어 화왕산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 의병장 진영에 들어가 참모역을 맡아 군사를 도모함으로 큰 공을 세웠다 하였으며, 임란 정유재란이 끝난 후 고향 고죽에 돌아와 집을 짓고 원근의 벗들과 강론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했다. 선생은 이후 진사 취죽당 김응명(金應命)과 한강(寒崗) 선생의 문하에서 이석담(李石潭), 김익재(金懼齊) 등과 도(道)와 의리(義理)로 사교(社交)하다가 병술년(丙戌年) 모일 향년 73세에 별세하였다. 또한 천안 전씨 집성촌인 고죽1리에는 1970년대 한의원을 열어 인술(仁術)을 펼친 이재(易齋) 전해인(全海印) 의인담(義人談)이 남아있다.▲ 전일재 앞에 세워진 이재 전해인 선생 인술 기념비 천안 전씨 재궁(齋宮)인 전일재(全一齋) 앞에 세워진 그를 찬양하는 기념비에는 당시 성균관 전학인 최규환이란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김으로 후대에 귀감이 되고 있다. “공의 사람 되심은 순후(淳厚)하시고 너그러워 셨도다. 몸가짐에 항상 조심하고 집안을 바로 다스리었으며 조상(祖上)을 높이 받들고 친척들을 사랑하셨다. 선영(先塋)을 수축(修築)하여 의례(儀禮)를 갖추시고,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祭祀)를 받드시고, 족보(族譜)를 만들어 간행(刊行)하시니 선조(先祖)들의 사적(事蹟)이 자세히 밝혀졌도다. 마음은 이미 높은 경지를 깨달으시니 글도 또한 문장(文章)이 되셨도다. 능히 인술(仁術)에 통달하시니 명성(名聲)이 사방에 떨치어 셨도다. 뭇사람들을 구제(救濟)함을 사업(事業)으로 삼으셨으니, 어느 누가 칭송(稱訟)하고 찬양(讚揚)하지 않았으리오. 온 일가를 단란하게 감싸 주시니, 화기(和氣)가 항상 온 집안 가득하였도다. 효성(孝誠)스럽고 우애(友愛)로우시고 충성(忠誠)스럽고 신의(信義)가 두터우시니 높은 덕망(德望)이 온 고을을 교화(敎化)하였도다. 이러한 뜻을 돌에 새김은 드높은 유덕(遺德) 자손만대에 전해지기를 바람이로다.”하고, 국역(國譯)은 영남대학교 이장우 교수가, 근서(謹書)는 이공우(李公雨) 향토 서예가가 맡아 1979년 청명 일에 천안 전씨 문중원 일동이 이 비를 세웠다 하였다. 천안 전씨가 집거(集居)하고 있는 고죽1리는, 멀리 동극(東極)의 구룡산(九龍山)이 발원한 우백호(右白虎) 줄기가 금박산을 이루고, 그 금박산이 금학산(金鶴山)이 되어 이 골에 충의(忠義)와 인술(仁術)을 남겼으니, 어찌 천안(天安) 하지 않으리오. ※ 본 원고는 천안 전씨 문중원의 증언과 내 고장 전통(1982, 경산군),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1984, 경상북도교육위원회), 경산의병창의(2016, 김종국), 용을 그리는 사람들(2022, 김종국), 경산임란의병항쟁(1999, 경산문화원) 등을 참고문헌으로 하였다.
경산시립극단 제10회 정기공연 「내 사랑 춘향」이 오는 11월 30일, 12월 1일 양일간 오후 7시 30분 천마아트센터 그랜드홀에서 전석 무료공연으로 펼쳐진다. 「내 사랑 춘향」은 고전소설 「춘향전」을 현대적 감각과 코믹함을 가미해 각색한 작품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열녀 춘향이 아닌 남자들과 몸싸움에서 가볍게 승리하는 무술 실력을 갖춘 씩씩한 춘향, 꽃을 사랑하며 소심한 성격의 몽룡과 많은 주변인이 등장해 장면마다 웃음을 자아내는 연극이다. 또한, 여러 상황에 어울리는 국악, 현대음악, 트로트 등의 음악으로 연극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대구·경북 지역 유명 배우 26명이 대거 출연하여 공연을 펼쳐 연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의 생동감과 즐거움을 전할 예정이다. 본 공연은 무료공연으로 티켓링크(www.ticketlink.co.kr)에서 11월 21일 오후 12시에 예매를 시작하고, 각 공연일 전날까지 예매할 수 있다. 또한 잔여석에 대해 공연당일 천마아트센터 그랜드홀에서 공연 시작 60분 전부터 좌석 티켓을 선착순으로 배부한다. 공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문화관광과(810-5359, 6668)로 문의하면 된다.
▲ 자인향교 제21회 기로연 장면 지난 10월 29일(토) 10시부터 경산시 자인면 교촌길9길 149(교촌리)에 소재한 자인향교(慈仁鄕校) 명륜당(明倫堂) 뜰에서 제21회 기로연(耆老宴)을 개최하였다. 기로연 행사장에는 삼성현 다예원(회장 손병숙) 회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한차(韓茶)와 다식(茶食)을 준비해 대접하였으며 경산향교와 경주이씨 종친회에서 보내온 축하 화환이 놓아져 있었다. 경산시가 후원하고 자인향교에서 주관한 이번 행사는 자인, 용성, 남산, 진량에 거주하는 유림과 기관, 단체 인사 1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사회자의 개회에 이어 국민의례, 상읍례(相揖禮), 문묘배향, 내빈소개, 이희문 전교 인사, 류한상 자인면장의 축사에 이어 향연이 펼쳐졌다. 향연은 먼저 노래자랑이 열렸는데 각 지역 대표가 출연하여 열띤 경쟁을 벌였으며 1, 2, 3등을 차지한 인사에 대하여는 푸짐한 상품이 수여되었고 참가상도 주어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향연 시간에는 주최 측에서 준비한 시루떡, 돼지고기 수육과 도토리묵 등 푸짐한 음식이 제공되어 서로 술잔을 권하며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쇠고기국과 갖은 반찬으로 맛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자인, 용성, 남산면 대항 윷놀이가 벌어졌다. 멍석을 깔아놓고 각 팀의 선수가 윷가락을 던지면 환호성을 질러대는 응원전도 볼만한 풍경이었다. 윷놀이 결과 용성면이 3연패의 영광을 거머쥐었으며 자인, 남산면이 각각 2, 3등을 차지하였다. 윷놀이가 끝나고 흥겨운 반주에 맞추어 한바탕 춤사위가 벌어졌는데 모두 젊은이의 기분으로 돌아가 각자 마지막 끼를 발휘하며 마음껏 온몸을 흔들어대었다. 마지막 순서로 천기찬 성균관 전의의 행운권추첨으로 많은 참석 인사에게 다양한 선물이 주어졌다. 기로연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모든 참석자에게 이희문 전교가 마련한 기념 타월을 배부하였다. 조선시대의 기로연은 1394년(태조 3) 한양 천도 후 태조 자신이 60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늙은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것이 처음이었다. 기로연은 매년 상사(上巳)와 중양(重陽)에 보제루(普濟樓)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에는 정2품의 실직(實職)을 지낸 70세 이상의 문과 출신 관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종친으로 70세에 2품 이상인 자, 정1품관, 경연 당상관들을 위하여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영회(耆英會)라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들 잔치에는 임금이 술과 1등급 풍악을 내렸다. 태조는 잔치 비용 마련을 위하여 토지, 노비, 염분(鹽盆) 등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 잔치는 예조판서가 주관, 준비하였고, 왕명을 받은 승지가 특별히 파견되어 감독하였다. 기로연에 참석한 문신들은 먼저 편을 갈라 투호(投壺) 놀이를 한 뒤, 진 편에서 술잔을 높이 들어 이긴 편에 건네주면 이긴 편에서는 읍(揖)을 하고 서서 술을 마시는데, 이때 풍악을 울려 술을 권하였다. 이러한 의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잔치를 열어 크게 풍악을 울리고 잔을 권하여 모두 취한 뒤에 파하였고, 날이 저물어야 서로 부축하고 나왔다. 태조, 숙종, 영조, 고종과 같이 나이 많은 임금은 직접 이 잔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오랜 기간 전해 내려오는 경로효친사상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경로잔치 형태로 진행되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 삶 속에서 경로효친이라는 유교 사상을 전승·함양해 소중한 전통이 이어져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인향교는 명종 17년(1562)에 경주부윤 이정(李楨)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4년(1612)에 도천산 아래에 옮겼으며 영조 4년(1728)에 현 위치에 다시 이건(移建)하였다. 1900년부터 1924년까지 대성전과 명륜당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하사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학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부터 교육 기능이 쇠퇴하여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자인향교에는 외삼문인 모성루(慕聖樓)가 서 있는데 팔작지붕에 3문으로 이루어진 2층 누각이며 2층에는 마루를 깔아놓았다. 향교 입구에 대·소인을 막론하고 모두 말(馬)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와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明倫堂)이 서 있고 그 앞마당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다. 명륜당은 향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으로 교실이라 하겠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측면 2칸의 이익공, 다포계 건물로 맞배지붕에 골 기와를 얹었다. 명륜(明倫)이란 말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동문공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기숙사와 같은 건물이다.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강학 공간이라 한다. 명륜당 동편에는 관리사가 자리 잡고 있다. 명륜당 뒤편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내삼문이 서 있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성은 전면 3칸, 측면 2.5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인향교는 외삼문인 모성루,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전학후묘 형태이다. 대성전 동편 모퉁이에는 문묘를 상징하는 은행나무가 서 있고 대성전 전면 좌측에 전사청(典祀廳)과 제기고(祭器庫)를 겸한 3칸의 건물이 서 있다. 자인향교에서는 음력 2월 상정(上丁)일과 8월 상정(上丁)일에 각각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석전대제의 시초는 후한 명제 때이고, 당나라 태종 때는 중국 전역에 문묘(文廟)를 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려 성종 때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종 때는 전국에 학교를 세우고 공자를 모시게 하였다. 충렬왕 때 국자감(國子監)을 성균관(成均館)으로 바꾸고 문묘를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였다. 향교의 건립은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기인하며 전국적으로 대부분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234개의 향교가 설립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 안에는 중앙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의 위폐가 봉안되어있으며 그 양옆에 연국복성공 안자, 성국종성공 증자, 기국술성공 자사, 추국아성공 맹자의 위폐가 봉안되어있다. 동쪽 벽과 서쪽 벽에 주희, 정호 등 송조 2현과 홍유후 설총, 문성공 안유, 문경공 김굉필, 문정공 조광조, 문순공 이황, 문성공 이이, 문원공 김장생, 문경공 김집, 문정공 송준길, 문창후 최치원, 문충공 정몽주, 문헌공 정여창, 문원공 이언적, 문정공 김인후, 문간공 성혼, 문열공 조헌, 문정공 송시열, 문순공 박세채 등 우리나라 18현의 위폐를 봉안하였다.
경산시민회관에서는 29일 오후 7시에“뮤직 인 시네마 콘서트 - 전쟁과 평화”를 공연한다. `6월 문화가 있는 날'을 맞이하여 공연되는“뮤직 인 시네마 콘서트 - 전쟁과 평화”는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전쟁의 아픔을 인식하고 순국선열들을 재조명하고자 기획된 공연이다.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빨간 마후라', 베트남전에 참전한 애인을 찾아가는 애틋한 이야기 '님은 먼곳에', 남북으로 나누어진 우리 민족 분단의 아픔을 담은 '웰컴 투 동막골'과 '국제시장' 등 영화의 OST를 영상과 함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연주를 통해 시민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할 예정이다. 한편, 관람료는 전석 무료이며, 20일 오전 9시부터 경산시시민회관 예매 사이트(http://gbgs.moonhwain.net)에서 예매할 수 있다.
경산시립합창단은 오는 21일 오후 7시 30분 경산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제26회 정기연주회를 전석 무료로 개최한다. 이번 연주회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월 평화를 그리며’라는 부제로 평화콘서트로 기획되었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유공자분들을 기억하고, 평화의 염원을 담아 진행된다. 연주회에서는 현대음악 작곡가인 스티브 드보르고스(Steve Dobrogosz)의 ‘미사곡(Mass)’을 시작으로, 테너 계명대학교 강현수 교수가 특별출연하여 ’마중‘과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을 공연하고, 이후 한국가곡 ’먼 곳‘ 등 9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본 공연은 무료공연으로 티켓링크(www.ticketlink.co.kr)에서 15일 12시부터 20일 12시까지 예매 가능하다. 또한 잔여석에 대해 공연 시작 60분 전부터 현장에서 좌석 티켓을 선착순으로 배부한다. 공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문화관광과(810-5359), 시립합창단 (810-6537)으로 문의하면 된다.
▲ 자인 시가지를 지나고 있는 호장장군 행렬 ‘2022 경산자인단오제’가 지난 6월 3일 성대한 개막과 함께 3일간을 일정으로 성황리 막을 내렸다. 특히 축제 중 마지막 날은 모처럼 단비마저 내려 가뭄에 시달린 농심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그간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2019년 이후 3년 만에 온전하게 개최되는 올해 단오제(端午祭)는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자인면 계정 숲 일원과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 등지에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 연일 운집(雲集)한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로부터 성공한 지역축제라는 평가를 받았다. 단오제 첫날(6월 3일)은 개막을 알리는 호장장군 행렬을 필두로 오전 10시 한 장군 대제가 계정 숲 진충묘에서 봉행 되었다. 이날 계정 숲 진충묘(盡忠廟)에서 봉행 된 한 장군대제(10:00~11:00)에는 초헌관(初獻官)에 최영조 경산시장, 아헌관(亞獻官)에 이기동 경산시의회 의장, 종헌관(終獻官)에 유오재 경산경찰서장이 소임을 하였고, 집례(執禮)에 최주근, 대축(大祝)에 손병한, 판진설(判陳設) 박승표·한용하, 사준(司樽) 장순남, 찬자(贊者) 안명욱, 알자(謁者) 김동용, 찬인(贊引) 최종수, 봉향(奉香) 최주호, 봉로(奉爐) 허호근, 봉작(奉爵) 김상해, 전작(奠爵) 황영기, 학생(學生) 김상봉 외 9명 등 모두 25명이 참례(參禮)한 가운데 엄숙히 봉행 되었다(한장군대제 집사분정기 참조). (사)경산자인단오보존회 최재해 이사장은, 지난 2019년 이후 그간 코로나19 여파로 그간 모든 것이 정지되었지만, 그래도 경산자인단오의 핵심인 다섯 마당은 지난 2년간 시민 초청 없이 비대면으로 이어오면서 이를 유튜브로 중계할 수 있었다고 밝히면서, 2022년 자인단오제는 그간 못다 한 경산자인단오제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반영하고자 하였다고 피력하였다. ▲ 자인단오 큰굿 굿판 장 이날 첫 행사는 오전 공연으로 버블 국악 공연(11:00~12:00), 악기 합주 공연(12:00~12:30), 자인단오 큰굿 순으로 이어졌으나, 무엇보다 관중들의 관심과 흥은 12:00~17:00 시까지 이어진 자인단오 큰굿 현장으로 몰리는 진풍경(珍風景)이 연출되었다. 올해 자인단오 큰 굿의 굿판은 예년과는 달리 계정 숲에 자리한 시중당 앞 특설무대에서 열렸다. 특설무대는 시중당((使衆堂)을 중심으로 천장에 여러 가지 화려한 색의 아치 모양의 종이가 양 갈래로 드리워져 있고, 굿당 기둥에는 각기둥마다 오색으로 한 장군을 뜻하는 장군 모양의 종이 인형이 모셔져 있고 기둥 앞에서는 종이로 청사초롱의 역할을 하는 장식을 달아 놓고 정면의 제상 위에는 불교에서 상징하는 명부전의 10대 제왕을 모시고 있다. 또한 마당에는 작두 거리 소품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산자인단오제 여원무 연행(사진 : 전명수 시인 제공) 오후 행사는 자인단오 큰굿과 함께 진량 보인농악 공연, 창포머리감기 시연, 계정들소리 공연, 여원무 공연, 경산시립교향악단 공연, 개막 축시 낭송, 개막식, 팔광대 공연 등으로 이어졌다.▲ 자인 계정들소리 시연 또한 이날 개막식에 참석한 최영조 경산시장은, 우리 지역의 전통 문화유산인 경산자인단오제가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현장에서 개최되는 만큼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흥겨운 단오제 정취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주문하였다. 축제 둘째 날(4일)에는 김천금릉빗내농악, 봉산탈춤 등 국가무형문화재 초청 공연과 국궁 시연, 군악대 공연이 이어지고, 대중가요로 구성한 팝콘서트와 경산아리랑제 경연 및 특별공연도 펼쳐졌다. ▲ 우중에 연행된 단오음악회(사진 : 박승표 자인면 번영회장) 마지막 날(5일)에는 오전 11시부터 긴 가뭄 끝에 모처럼 단비가 종일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국가무형문화재 강강술래와 영산줄다리기, 경산시립극단과 평양예술단의 공연이 펼쳐지고, 팔광대가면 가왕가요제, 단오음악회 등이 성공리 마무리되면서 많은 시민 관광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축제 기간 계정 숲 행사장 곳곳에서는 창포 머리 감기, 민속놀이체험, 천연염색, 다도(茶道), 단오부채 만들기, 전통공예, 떡메치기, 신기전, 캘리그라피 등 다양한 전시·체험 행사들이 펼쳐지고 또, 부대행사로 계정 숲 예술전, 야생화 작품전, 독도 및 단오 사진·단오 음식 전시, 중방농악 페스티벌, 삼성현 백일장 및 미술대회, 자인단오 남녀 궁도대회, 자인단오 씨름대회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였다는 호평을 남겼다. [우리나라 단오제 유래] 단오(端午)의 어원(語源)은, 단오는 일명 수릿날 ‘술의 일ㆍ수뢰일’, 천중절, 중오절,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자는 첫 번째를 뜻하고, '오'는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중오(重午)는 오(午)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는 것으로, 양기(陽氣)가 왕성한 날로 풀이된다. 음양 사상에 따르면, 홀수 ‘기수’를 '양의 수'라하고, 짝수 ‘우수’를 음의 수라 하여 '양(陽)의 수(數)'를 길수(吉數)로 여겼다. 예컨대 전통 사회의 절일로서 설(1월 1일)ㆍ삼짇날(3월 3일)ㆍ칠석(7월 7일)ㆍ중구(9월 9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를 '길수'로 여기는 기수민속들이다. 이러한 기수민속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릿날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 5월 조의 기록에 전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이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또 수리란 고ㆍ상ㆍ신 등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어인데, '신의 날', '최고의 날'이란 뜻에서 불렸다고도 하며, 일설에 의하면 단오의 유래와 더불어 중국의 초나라 사람 굴원이 수뢰에 빠져 죽었다 하여 수릿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단오의 민속적 유래는, 단오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째에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굴원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이었다. 그 후 해마다 굴원(屈原)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와 단오가 되었다고 한다. 단오의 풍속은, 입하와 소만을 지나 음력 오월이 되면 태양의 열기가 뜨거움을 더해 간다. 오월의 절기로는 망종과 하지를 들 수 있다. 절기는 태양의 운행에 기초를 둔 것이며, 농사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컨대 망종은 보리나 벼와 같이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을 거두거나 모를 내는 절기이며, 하지는 낮이 가장 긴 절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농사력은 《농가월령가》 오월 조의 농사 관련 부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오월은 여름철 세시풍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 명일로는 5월 5일 '단옷날'을 들 수 있다. 단옷날은 고려시대의 9대 명절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였다. 단오는 일 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생각하여 여러 가지 풍속과 행사가 행해졌다. 전통 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였다. 또 단옷날 새벽 상추밭에 가서 상춧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분을 개어 얼굴에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남자들은 단옷날 창포 뿌리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이는 벽사(벽邪)의 효험을 기대하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단옷날 중에서도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생각하여 전통 사회의 농가에서는 약쑥,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말려 두기도 한다. 말려 둔 약쑥은 농가에서 홰를 만들어 일할 때 불을 붙여놓고 담뱃불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또 오시에 뜯은 약쑥을 한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는 일이 있는데, 이는 재액을 물리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농가에서는 대추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는 습속이 있는데,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 한다. 단오의 대표적인 놀이로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들 수 있다. 그네뛰기는 단옷날 여성들의 대표적인 놀이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보면 한복을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남성들의 놀이로 씨름대회가 있다. 씨름대회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관례로 황소를 상품으로 주는데, 경기방식은 요즘과 같이 토너먼트식이 아니라 도전자들을 모두 이겨 상대자가 없게 되면 우승을 하게 된다. 한편 지역민들의 일체감을 고취하는 의례로서 '단오제'와 '단오굿'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강원도 강릉지방의 강릉단오굿, 경남 영산의 문호장굿, 경북 자인의 한장군놀이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의례들은 각종 놀이 및 행사들과 접목되어 지역민의 축제 형식을 띠고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 5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궁중 내의원에서는 옥추단과 제호탕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 "공조에서는 단오선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라는 궁중 풍속이 전한다. 제호탕은 한약재를 꿀에 섞어 달인 약으로 더위가 심한 여름철 건강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옥추단은 일종의 구급약으로 여름철 곽란이 났을 때 물에 타서 마신다. 부채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도구로 단오 무렵이면 더위가 찾아오니, 이날 부채를 만들어 왕에게 진상한 것을 '단오선'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혜원 ‘신윤복’의 풍자한 단오풍경도(국보 135호)의 해석편에 의하면, 매 음력 5월 5일 단오는 무더운 여름의 초입에 서서 막 끝낸 모내기한 곡식이 별 탈 없이 익어 풍년으로 이어지기를 비는 날이기도 하고, 일 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므로 한껏 양기를 북돋고 온몸으로 안는 날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이날을 맞이하여 음식을 장만하여 창포가 무성한 못 가나 물가에 가서 물맞지 놀이를 하며, 창포 이슬을 받아 화장수로도 사용하고, 창포를 삶아 창포탕을 만들어 그 물로 머리를 감기도 한다. 그러면 머리카락이 소담하고 윤기가 흐르며 잘 빠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또한 그네뛰기와 씨름도 단오를 맞아 즐기는 놀이였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들에게도 이날만은 밖에서 그네 뛰는 것이 허용되었다(중략).
송하 전명수- 경산시 용성면 고죽리 출생- 수필가- 교육행정직 공무원 정년퇴직- 저서: 수필집 「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 (사) 대구문화재지킴이회 회원,- (사)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 사회복지법인 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 대구문화기행단 운영- 녹조근정훈장 수훈 임인년 정월 대보름날이다. 도시 생활이 갑갑하여 고향에 머무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자 고향에 친구들과 교유하는 시간이 잦아지게 되어 즐거운 시간이 늘어나는 듯하다. 옛날 같으면 정월 대보름날이 명절이다. 오곡 잡곡밥에 아홉 가지 나물로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호도나 강밥으로 부름을 깨기도 하였다. 주로 혼자 지내고 있는 터라 인근 동에 사는 친구가 낮에 찰밥 먹고 가라 하였다. 고맙고 기쁜 마음으로 친구댁에서 맛나게 점심을 먹고 난 후 친구는 자기 조상 한분을 소개하면서 같은 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인지재(仁智齋)로 안내하였다. 친구 최용석 군은 영천최씨 원당 문중 대표라 문중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인지재는 경북 경산시 자인면 원당길14길 19(원당리)에 위치하여 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자인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1557-1599) 선생이 강학소를 설립한 후 의병을 일으킨 장소이다. 처음에는 인지정사(仁智精舍)라 부르다가 그 이름을 인지재로 바꾸었다. 최문병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18세기 초에는 서당으로 활용하였으며 선생을 추모하던 용계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어 최문병 선생의 신주를 이곳 인지재에 모셔 추모하였다. 용계서원은 1986년에 복원되어 선생의 신주를 다시 모셔갔다. 인지재는 1,643㎡의 네모반듯한 대지 위에 본당과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구조는 우측에 대청마루 한 칸과 좌측에 2칸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전면 반 칸은 툇간을 두었다. 규모가 비교적 작은 건물이지만 방문을 열면 방과 대청이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공간의 구성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조선 중기 지방 강학소(講學所)의 건축 구성을 가진 소박한 건물이나 의병장 최문병 선생이 수학하다가 임진왜란 때 자인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 장소라는 점에서 경상북도 의병사(義兵史)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2019년‘경산시향토문화유산보호및관리에관한조례에 의거 인지재(仁智齋)를 첫 번째로 경산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최문병 선생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일장(日章), 호는 성재(省齋)이며 부친은 최식(崔湜)이고 모친은 경산전씨(慶山全氏)이다. 선생은 1557, 4, 20 지금의 경산시 자인면 울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산 자인에 살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후학 양성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장 과정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부모에게 효도하는 본을 보이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천장산(千丈山)에서 자인과 인근의 왜적을 격퇴하였으며, 자인의 관곡(官穀)을 무사히 지켜내는 등 자인지역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문병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탁월한 예지력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화살과 창 등을 미리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는 김응명 선생의 부친인 김우련 선생과 힘을 합쳐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지방의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최문병 선생은 장신에 건장한 신체를 가졌으며 그의 조상은 주로 무인이 많았다고 하니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듯하다.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朴慶傳) 의병장의 지원 요청에 따라 그와 합세하여 두곡(杜谷)·선암(仙巖)·가지현(佳旨縣)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며 팔공산 회맹에도 참여하였다. 이어 다시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의병장과 합세하여 하양, 와촌, 영천 등지의 적을 물리친 공으로 1593년에는 동지중추부사 박진(朴晋)의 상주로 인하여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뒤에 한성부윤에 추증되었고, 자인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최문병 선생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인현 복현 운동에 앞장선 선각자였다. 자인은 995년 행정구역이 고려국 영동도 장산군 자인현이었다. 그 후 1018년(고려 현종 9) 경주부의 속현이 되어 자인은 경주까지 거리가 멀고 험한 길이었으며 경주부의 관원들로부터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재산상의 피해와 극심한 고초를 당한 지역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피해를 벗어나는 길은 자인이 복현되어 현감이 파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최문병 선생이 주동이 되어 1584. 4. 13. 자인 유향소 좌수 안량, 별감 권응형, 유사 임세진, 장병 이응기 등과 함께 자인현 복현 운동을 시작하였다. 최문병 선생은 당시 26세의 나이로 자인의 품관이었다. 자인 우시장에서 소를 구매하고 현민을 규합하여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서 복현 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의한 후 임금에게 올릴 상소문을 경상도 관찰사 류성룡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거사는 경주부 관원들이 알게 되어 1584. 5. 1. 최문병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경주부로 압송되어 심한 공초(供招)를 당하였다. 공초의 죄목은 관부(官府) 사칭, 뇌물 갹출, 경주부 배반, 농우 도살 등으로 엄한 처벌을 받았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기세를 바탕으로 1599년(선조 32) 제2차 자인현 복현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나이 42세였고 제1차 복현 운동을 전개한 지 15년 만이다.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은 경주부를 방어한다는 구실로 자인에 주둔한 군인 전원을 차출해 가는 바람에 자인은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평소에는 자인 주민들을 착취하다가 정작 위기 시에는 자인을 버린 셈이 되었다. 감목(監牧) 신분인 최문병 선생은 1599년 봄 최두성, 이기업 등과 자인을 대구부에 합속시키려고 경상도 관찰사 한준겸에게 소장을 올렸다. 이에 경주부에서는 1599. 7. 14. 반박 소장을 올렸는데 관찰사는 경주부의 손을 들어 주어 최문병 선생의 생전에 그 뜻을 이루지 하였다. 그 후 1633년에 백렴, 방희국 등이 각각 상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1637년 김응명, 이시험, 이창후, 백현룡 등이 다시 복현 상소를 올려 인조 임금으로부터 윤허를 받고 1637년 6월에 초대 현감 임선백이 파견되었다. 이처럼 최문병 선생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장으로 약 1,000여 명이라는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을 물리친 공로가 지대하다 하겠다. 그리고 경주부 속현된 자인현을 두 차례에 걸쳐 복현 운동을 전개하다가 심한 공초로 인하여 1599. 8. 4. 4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자행되어 온 경주부의 갖은 행패로부터 자인 현민들을 구하려는 애향심의 발로에서 시작된 복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좌절감과 극심한 공초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듯하여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앞을 가린다. 최문병의병장안장 최문병 선생이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던 말안장이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 경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말안장은 최문병의병장안장(崔文炳義兵將鞍裝)이란 명칭이 붙여져 있는데 길이 56㎝, 너비 39㎝, 높이 34㎝이고 안장은 등자(鐙子), 띠, 고들개 등 부속 장구를 모두 갖추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앞뒤 안교(鞍橋)는 나무로 윤곽을 잡고, 가는 골제(骨製)로 복륜(覆輪)을 붙였으며 쇠로 고정시켜 놓았다. 앞뒤 안교의 바깥쪽에는 고슴도치 가죽을 씌우고 세 곳에 골편(骨片)으로 꽃모양 장식을 만들어 붙였다. 안교의 아래쪽은 둥글려서 파내고 그 테두리에도 골편을 붙였다. 말다래가 달린 안장자리는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가로 105㎝, 세로 26㎝의 크기이다. 등자는 철제이고 발디딤은 둥근 모양이다. 그리고 배 띠와 고들개는 마포(麻布)와 면직(綿織)으로 만들었다. 이 안장 금구들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희귀한 마구(馬具)로서, 괴목제(槐木製)의 책상과 저지(楮紙)로 만든 지함(紙函)이 함께 전해오고 있다. 성재 선생 사후 약 50년 후인 1646년에 그의 후손 최영기가 선생의 활약 사항과 글을 묶은 「省齋先生實記(성재선생실기)」 상, 하 두 권을 편찬하여 전해지고 있다. 인지재(仁智齋)가 현 원당리(元堂里) 소재로 이건(移建)한 시기는 자인현(慈仁縣)이 지금의 신관리(新官里)에 소재하였다가 원당리로 이건한 후 관아에 우환이 잦아들자 북사리로 옮겨간 이후이다. 인지재를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710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그때 이곳에 인지재가 세워진 것이다. 지금의 인지재(仁智齋) 자리는 1666년 현감으로 부임한 남궁옥(南宮鈺)이 원당리로 관아를 옮기면서 이후 3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한 원당리 소재 자인 현청(縣廳) 부지였다. 그러니 인지재 부지는 자인현청(慈仁縣廳)이 소재하였던 경산의 중요 기록유산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의병(義兵) 창의(倡義)를 숙의(熟議)하였으며 봉기(蜂起)를 도모하였던 교두보(橋頭堡)로 중요한 유적이므로 더욱 다듬고 길이 보존하여야 할 경산 임란 의병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그런데 지금의 인지재(仁智齋)는 부서진 기와지붕에 빗물이 흘러 흉물스러운 천막(天幕)을 씌워 놓았고 10개의 초석(楚石)에 놓인 기둥은 균형을 잃은 듯 기울어지는 상태이다. 뜻하지 않게 예지력이 뛰어나고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크게 공을 세운 충신이요, 자인현 복현 운동에 앞장섰다가 고초를 겪은 선각자 한 분을 만난 일은 분명 행운이었지만 너무나 일찍 세상을 하직한 점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또 그분을 기리는 전각이 바라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허술한 점이 후예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마음이다. 경산시 지정 문화유산이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음에 씁쓸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긴다. (2022. 2. 15. 화)
▲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에 자리한 자인향교(사진 자인향교 모성루)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6호(1985년 8월 5일)로 지정된 바 있는 자인향교(전교 김상도)는 지난 음력 2월 상정일(上丁日, 첫 번째 丁日)인 3월 5일(양력) 오전 10시에 춘계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였다. 이날 대제(大祭)는 최근 급격히 늘어나는 코로나19의 철저한 방역 수칙 준수와 함께 자인향교 출입 지역 유생 등 5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초헌관(初獻官)에 김상도(69) 현 자인향교 전교가, 아헌관(亞獻官)은 이원종(79) 탤런트 겸 현 경산시립극단 예술감독이, 종헌관(終獻官)은 최용석(77) 현 영천최씨 원당 문중회장이, 분헌관(分獻官)은 유학 이상정(68)씨와 대구과학대학교 최주근(67) 교수가, 집례(執禮)에는 전명수(77) 전 교육공무원이, 대축(大祝)에는 유학 최선교(77)씨, 알자(謁者)에는 유학 김영구(64)씨가 각각 소임하였다. 2002년 6월에 편찬된 자인향교지에 의하면, 자인향교는 본래 고려 공민왕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하였고, 1562년(명종 17)에 경주 부윤 이정(李楨)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5년(광해군 7)에 도천산(到天山) 아래에 이전하였다가 1728년(영조 4)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과 1922년에 각각 중수하였다는 대성전(大成殿) 1900년과 1922년에 각각 대성전(大成殿)을 중수하였고, 1924년에 명륜당(明倫堂), 1926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현존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5칸의 모성루(慕聖樓), 4칸의 동재(東齋), 평삼문(平三門), 4칸의 하당(下堂), 2칸의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다. 건축 형태는 명륜당이 있고 그 뒤쪽에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남향한 경사면에 3단으로 층을 이루어 아래부터 외삼문, 명륜당, 대성전으로 배치되었고, 대성전 왼쪽에는 서무, 뒤쪽에는 화계가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대성전 내부에 진설한 제수와 제의 의례(초헌관 김상도 전교) 석전(釋奠)이란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이다. 여기에 석(釋)은 '놓다(舍)' 또는 '두다(置)'의 뜻을 지닌 글자로서 '베풀다' 또는 '차려놓다'라는 뜻이며, 전(奠)은 추(酋)와 대(大)의 합성자로서 '酋'는 술병에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이며, '大'는 물건을 얹어두는 받침대를 상징한다. 따라서 석전은 생폐(生幣)와 합악(合樂)과 헌수(獻酬)가 있는 성대한 제전(祭典)으로 석전제·석채·상정(上丁)·정제(丁祭)라고도 한다. 이와 유사한 말로 석채(釋菜)가 있는데, 이는 나물 종류만 차려놓고 음악이 연주되지 않는 조촐한 의식이다. 석전의 의식절차는 홀기(笏記)에 의해 진행되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격을 그 원형으로 하고 있다. 제관은 전일(前日)에 재계(齋戒)를 하는데,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을 행한다. ▲ 임인년 석전대제(춘) 집사분정기 봉행절차는 초헌관(初獻官)이 폐백(幣帛)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에 이어 초헌관이 신위전(神位前)에 첫 술잔을 올리고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는 초헌례,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인 아헌례(亞獻禮), 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종헌례(終獻禮), 초헌관이 음복위에서 음복잔을 마시고 수조하는 의식인 음복수조례(飮福受胙禮), 대축이 변과 두를 거두는 의식인 철변두(撤籩豆), 초헌관이 망요위에서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것을 보는 의식인 망료례(望燎禮) 등으로 진행된다. 보편적으로 석전복식에는 금관제복과 유건도포(儒巾道袍)가 있다. 금관제복에는 금관·홀(笏)·수(繡)·중단(中單)·상(裳)·패(佩)·방심곡령(方心曲領)·흑각대(黑角帶)·말(襪, 버선)·이(履, 신)·폐슬(蔽膝, 무릎가리개)·대대(大帶, 큰띠)·의(衣, 겉에 입는 옷)이며, 유건도포에는 유건·도포·목화(木靴, 목이 긴 신발)·사대(紗帶, 도포끈)·행전(行纏) 등이다. 석전대제는 정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 제례악이 연주되고 일무가 추어지는 종합 예술적 성격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이는 집례가 읽어 내려가는 제의 진행 의례(사회 시나리오)가 모두 한자 원문으로 표기되어 있어 적잖은 한문 실력자를 제외하고는 읽지도 해석도 어렵다는 점이다.▲ 한자 원문에 의한 진행(전명수, 77)과 알자의 안내를 기다리는 헌관 이에 대하여 자인향교 전교 출신인 천기찬(85) 성균관 전의는,“지금까지는 향교에 몸담은 60~70대 지역 유생들이 행사 때마다 답습적 학습을 통해 큰 무리 없이 집례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한문 세대가 아닌 청소년 세대들이 이를 전수해 나가기에는 충분히 고려하여야 할 사안임은 부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이미 한자로 엮어진 불교 경전(반야심경)도 불교계에서 먼저 우리말로 바꾸어 나가는 예를 보더라도 앞의 제안은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 아닌가 싶다.
▲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 『인지재(仁智齋)』의 현상 경산시는 역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ㆍ경관적 가치가 높은 지역의 비지정 문화유산을 보존ㆍ관리하기 위해 지난 2019년 ‘경산시 향토문화유산보호 및 관리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 후, 다음 해 12월, 향토문화유산보호위원회를 열어 관내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 소재 『인지재(仁智齋)』등 모두 3건에 대해 경산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 의결하고 이를 지정 예고 후 지정 고시하였다. 이중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산 『인지재(仁智齋)』는 지난 2013년 6월 29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선정된 바 있으나, 동 문화재에 대한 보호구역 설정 과정에서 이를 신청 문중에서 취하함으로 보존에 어려움을 겪어온 경산지역 임란(壬亂) 관련 고건축물로는 유일무이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이는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성재 최문병 강학소로 건립되면서 자인현역 의병 창의에 직접적으로 활용된 건물로, 이는 지역 의병사에 중요한 인물 및 장소성을 가진 역사적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성재 선생 실기에 의하면, 인지재는 1579년(조선 인조 12년) 당시 자인현이 경주부에게 속현되어 있을 때, 지금의 자인면 울옥리(당시 울곡동)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건립 당시 당호는 『인지정사(仁智精舍)』라 하였다가 1587년경에 『인지재(仁智齋)』로 개칭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동 기록에는 선생이 1589년부터 나라에 큰 국란을 예견하고 홀로 『인지재(仁智齋)』에 기거(起居)하면서 활과 화살, 칼 등의 무기를 수집, 닥쳐올 앞날을 크게 근심하던 중,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스스럼없이 구국 대열에 나설 것을 맹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덧붙여『인지재(仁智齋)』가 현 원당리(元堂里) 소재로 이건(移建)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자인현(慈仁縣)이 경주부로부터 복현된 시기인 1637년에서 이후 30여 년간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신관리(新官里)에 소재하였다가, 현감 남궁옥南宮鈺)에 의해 신관리에서 원당리로 이건(이 무렵 울곡동에 세거하였던 영천최씨들 또한 지금의 원당리로 전거(轉居)하였다)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 원당으로 관아(官衙)를 옮긴 후부터 계속 우환(憂患)이 잦아들게 되자, 1699(숙종 25)년에 김시휘(金始徽, 1696~1699년) 현감이 지금의 자인초등학교 교정이 있는 북사리(이전에 표기한 ‘서부리’는 필자의 오기로 바로잡는다) 일대로 이건(移建)하였다. 이러니 지금의 『인지재(仁智齋)』가 소재한 부지(敷地)는 1666년 현감으로 부임한 남궁옥(南宮鈺)이 원당리로 관아를 옮기면서 이후 3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한 원당리 소재 자인 현청(縣廳) 부지였던 셈이다.▲ 『인지재(仁智齋)』의 주요 건축 부위 세부 실측도 영천최씨 원당문중 최용석(77)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그 자리에 『인지재(仁智齋)』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1699년 현감 김시휘(金始徽)가 현청을 북사리로 옮기게 되면서, 당시 북사리 일대 영천최씨 소유 자산을 원당리 소재 구 현청 부지와 서로 교환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인지재(仁智齋)』의 이건 시기는 이후 1차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710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면서 최초 원당리로 옮겨 세운 시기 또한 1710년경으로 유추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기록과 증언은 곧 고려 현종(顯宗) 재위 시부터 1637년까지 무려 600여 년간 경주부(慶州府)에 속현(屬縣)되었던 자인현(慈仁縣)이 복현(復縣)된 후 두 번째로 자리 잡았던 현청(縣廳) 소재를 입증하는 경산시의 중요 기록유산이요, 이에 『인지재(仁智齋)』는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의병(義兵) 창의(倡義) 숙의(熟議)와 봉기(蜂起)를 도모하였던 교두보(橋頭堡)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료로, 길이 보존하여야 할 경산 임란 의병사(義兵史)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굴곡을 걸머쥔 체 4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지켜온 『인지재(仁智齋)』는 아래 사진에서와 보는 바와 같이 부서진 기와에는 빗물이 흘러 흉물스러운 천막(天幕)이 이를 가려주고, 10개의 초석(楚石)에 놓인 기둥은 세월의 무게에 이기지 못해 균형을 잃고, 그저 무심한 세월 소리는 산바람마저 지쳐 지나간다.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된『인지재(仁智齋)』는 경산시가 지정한 경산문화유산의 얼굴일 터인데 지정 3년이 지나도 그저 속수무책 치켜만 보고만 있는 지정(指定) 당국의 향후 대책이 아쉽기만 하다. 덧붙여, 1592년 4월 임란 발발 당시 경산지역(경산, 하양, 자인현역)에는 무려 3천 명이 넘는 현민(縣民)들이 창의(倡義)하여 오로지 우국충정(憂國衷情) 일념으로 초개(草芥)와 같이 목숨을 걸고 오늘의 경산(慶山) 땅을 사수(死守)하여 왔지만, 변변한 임란 추모 공간 하나 현창(顯彰)하지 못한 관계 당국의 문화정책을 훗날 경산사(慶山史)는 무어라 평가할까 두렵기만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우리 설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먼저, 고려의 태조 왕건과 관련된 설화에서와 같이 신령하고 신통한 능력을 지닌 영물로서 표현되는 경우이다. 왕건이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폭우를 피하여 동굴 속에서 친구들과 머무르고 있을 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나 으르렁거리며 잡아먹으려 하였다. 친구들과 의논하여 웃옷을 던진 뒤 던진 옷 중 물어 올리는 옷의 주인이 희생당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중 호랑이가 왕건의 옷을 물어 올려 약속대로 왕건이 굴 밖으로 나가니, 그 순간 굴이 무너져 간발(間髮)의 차이로 왕건이 살아나게 되었는데, 호랑이는 순간 자취를 감추고 찾아볼 수 없었다 했다. 다음은,《삼국유사》권 제5, 감통(感通) 제7,『김현감호』편에서와 같이 호랑이가 자유자재로 인간으로 변신하여 인간과 교유한다는 기록이 있다. 즉, 흥륜사(興輪寺)에서 탑돌이를 하던 김현(金現)은, 한 소녀를 만났는데, 이 소녀는 둘로 변신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소녀를 따라 호랑이굴로 들어가게 되어 소녀의 형제 호랑이에게 잡혀서 먹히게 된 것을 소녀의 기지(奇智)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형제호랑이의 살생에 대한 천벌이 멀지 않음을 감지한 소녀가 김현의 손에 죽음을 당하여 형제를 살리고, 김현에게 공을 돌렸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는, 인간의 행위에 감동된 두 개의 인간을 도와주는 경우, 또는 인간에게 도움을 받고 그 은혜를 갚는 경우이다. 이상의 유형이 호랑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경우라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랑이와 토끼의 설화는 호랑이의 어리석음을 희화적(戱畵的)으로 표현한 유형에 속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꾀 많은 토끼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게 되었다. 토끼는 꾀를 내어 먹을 것이 많은 곳을 가르쳐 줄 테니 잡아먹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어리석고 욕심이 많은 호랑이는 토끼를 따라 강변에 가서 꼬리를 물에 담그고 많은 물고기가 잡히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점점 물이 얼기 시작하여 꼬리가 무거워지는 것도 모르고 더 많은 물고기가 달리기를 기다리다 결국 물이 얼어붙어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이상의 설화에 나오는 호랑이상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무섭고 두려운 맹수이지만,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동물로서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어리석고 의뭉스러울지라도, 전혀 간교하지 않고, 오히려 우직함이 돋보이는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게 곧 호랑이의 상징적 표현이다. 민화 속의 등장하는 호작도는 호랑이를 꾸짖는 까치를 해학적으로 풀이한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탐관오리를 풍자하지만 청렴한 까치가 있어 이에 물들지 않는다 하였고,《동국세시기》에서는“민가의 벽에 닭이나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치고자 한다”하였다. 이러한 벽사의 염원은 호랑이삼재부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삼재는 곧 풍(風)·수(水)·화(火)에 의한 재난을 의미한 것으로, 정초의 세화(歲畵)나 부적에 호랑이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호랑이의 용맹성을 바탕으로 벽사행위의 완성을 꾀하려는 민중 속에 전승되는 지혜로 볼 수 있다. 또한 호랑이는 민중 속에 강력한 신앙적 존재로 아래와 같이 산신신앙의 신체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호랑이는 사나운 맹수지만 때로는 범과 같이 온순한 존재로 인간들을 구제하는 친근한 존재로, 벽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참고로 인간의 띠 궁합론에는 호랑이띠 해에 개띠, 돼지띠, 말띠와는 서로 잘 소통되는 반면, 원숭이띠 뱀띠와는 서로 간에 이해와 배려가 요구되기도 한다는 풀이가 전제되고 있다. 그 원리는 설화적 풀이로, 개띠는 책임감이 강하고, 욕심이 적고, 현실에 만족하는 성격으로, 호랑이띠와 원만한 띠에 속하고, 돼지띠는 성실하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저돌적인 성향이 있어 호랑이띠와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고, 말띠는 행동이 앞서는 성격으로 행동적인 말띠와 용맹한 호랑이띠의 궁합은 무난하다는 평이다. 반면 원숭이띠와 뱀띠는 서로 주관이 강하여 양보하지 않는 궁합으로 서로의 장점보다 단점을 들추어내기 쉽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인간관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2년 임인년은 호랑이의 기상과 같이 걸림 없이 모두가 건강하고 가정마다 행운이 가득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